최원식
한국(韓)
동아시아문학 공동의 집
최원식 (CHOI Won-shik)
1. 집짓기
이번 기조발제는 저의 고별사입니다. 10년 전 열린 첫 포럼부터 두 번째 바퀴가 다시 시작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문학포럼의 경과를 돌아보건대 우여곡절조차도 반짝입니다. 아니 그 모든 우여곡절이야말로 포럼의 육체와 영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건설한 동아시아문학포럼이라는 집은 어떤 유명한 건축가가 책상 위에서 혼자 뚝딱 만든 신기루가 아니라 이 집에 입주할 세 나라 작가들이 궁리 끝에 쌓고, 살면서 고쳐 쌓고, 그리고 아마 신입자가 들 때마다 수정이 더해져, 완성이 끝없이 미끄러지는, 다시 말하면 완성이 곧 미완으로 되는 ‘공동의 집’(the common house)이기 때문입니다. 쏘로우가 말하는 ‘이 같은 무의식적 생활의 아름다움’(a like unconscious beauty of life)이란 바로 우리 동아시아문학포럼에 꽤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 국민, 언어의 경계를 넘는 일이 어떠한지를 실감한 10년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넘는다’는 말에 어폐가 없지 않습니다. 양자 관계라면 넘는다는 말이 그럴듯하지만 셋이 되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셋은 이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걸치다’란 뜻을 지닌 중국말 ‘콰’(跨 kuà)가 우리 포럼을 가리키는 데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포럼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다른 세상’의 시민으로서 중국말, 일본말, 한국말 사이에 걸터앉게 되는데, 더욱이 이 세 말은 중국의 『시경』(Shījīng, 詩經)과 일본의 『망요슈』(萬葉集)와 한국의 『삼대목』(三代目) 이후 물경(勿驚) 천여년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된 고도의 문학어입니다. 그 덕에 이 포럼으로 살러온 작가들은 졸지에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에서 도착한 가없는 언어들 사이를 잇는 연락원의 책무를 떠안게 되거니와, 낯선 독자들의 호응으로 그 책임은 은은한 기쁨으로 홀연 변신하던 것입니다. 이 ‘공동의 집’을 둥그렇게 감싼 한중일 세 나라 독서공동체의 나지막하지만 견결(堅決)한 옹호야말로 바로, 포럼의 오늘을 이끈 결정적 언덕이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바입니다.
(후략)
톄닝
중국(中)
시간과 우리
톄닝 (TIE NING)
귀빈여러분,친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년전이풍요로운계절에제1차동아시아삼국문학포럼이서울에서열렸습니다. 10년뒤의오늘제4차한중일문학포럼이다시금서울에서열리게되었습니다. 10년전포럼에참가한세나라작가들은서로낯설었습니다. 10년뒤의오늘우리가다시만나니우리들의익숙한눈빛과표정은서로에게말해주고있습니다.시간이여,감사합니다.우리를서로이처럼오랫동안알고지내게하다니요.
이시간중국의옛말이떠오릅니다. “10년수목(樹木)”.이말은중국춘추시기저명한정치가인관중(管仲)이한말인데나무한그루가자라서큰나무가되는데10년이걸린다는뜻으로, 나무가숲이되는것이결코쉽지않다는의미를나타냅니다. “수(樹)”는여기서는동사로쓰여심어키우다는의미를담고있습니다. 동아시아문학포럼은10년의세월이지나참가자모두의공동노력하에작은나무는성장하여건강한큰나무가되었고자신에속한숲을갖게되었습니다.포럼에참가하는모든작가한분마다각각독립된문학의나무로비유할수있다면바로모든작가분들이모여이포럼을문학의숲으로만든것입니다.
히라노 게이치로(PHOTO©MIKIYA TAKIMOTO)
일본(日)
작가와 작품, 독자와 현실의 틈새에 서서
히라노 게이치로(PHOTO©MIKIYA TAKIMOTO) (HIRANO Keiichiro (PHOTO©MIKIYA TAKIMOTO))
4회째를 맞는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의 한 작가로서, 그리고 일본작가단의 단장으로서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이번 대회 개최를 위해 수고해 주신 한국, 중국 양국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8년의 제1회 서울대회, 2010년의 제2회 기타규슈대회, 그리고 2015년의 제3회 베이징대회, 이렇게 첫 번째 사이클의 포럼은 성공리에 마쳤습니다만, 사실은 일본은 그 이후의 포럼 참가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포럼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실행위원회도 한국, 중국과 전적으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주로 재정적인 사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이클의 포럼 개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중 양국은 항상 정열로 가득 찬 따뜻한 격려로 저희의 용기를 북돋아주어, 최종적으로는 한중공동주최라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일본에도 종래와 같은 참가인원을 배정해, 열 명의 작가를 여기 서울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양국의 조직위원회가 이 포럼에 있어서 일본 작가의 계속적인 참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최대한의 경의와 함께 열심히 설득해 주신 것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제4회 포럼의 테마는 ‘21세기의 동아시아문학, 마음의 연대’입니다만, 이 포럼의 존재 자체가 그야말로 그런 ‘마음의 연대’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10년에 걸친 이 포럼에 저는 처음부터 전부 참가하는 행운을 얻어, 추억거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만, 인상에 강렬히 남아 있는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1회 서울대회 후에 우리는 춘천으로 이동해, 그곳에서도 몇 가지의 문학이벤트를 개최했습니다. 그 중 하나로서 춘천과 연고가 있는 작가 김유정을 기념하는 <김유정문학의 밤>이라는 야외 이벤트에 참가했습니다. 10월3일의 일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노래와 춤 공연이 펼쳐지고, 드넓은 공원 안에서는 바비큐도 제공되어 매우 즐거운 하루였습니다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엄청나게 추웠다는 것으로, 작품 낭독을 할 예정이었던 저는 무대 위에서 계속 떨고 있었고, 들으러 와준 다른 작가와 현지의 사람들 역시 꽁꽁 얼어 있는 듯했습니다.
제 옆에는 모엔 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각자의 작품을 순서대로 낭독해 가는 기획이었기에, 우리는 그 사이에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만, 끝나고 제가 저도 모르게 영어로 ‘춥네요’라고 말을 걸자, 그는 정말로 그렇다는 식으로 웃으면서 제 위팔 부근을 몇 번이나 싹싹 문질러 주었습니다.
모옌 씨의 작품은 이전부터 『붉은 수수밭』이랑 『술의 나라』를 읽었으며, 그때는 마침 일본어 번역본이 간행된 『전생몽현(轉生夢現)』에서 소로 살다가 죽은 주인공이 염라대왕에게 당나귀로 환생하게 된 것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는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모옌 씨는 일본에서도 매우 평가가 높으며 그 존재는 거의 신비화되어 있어, 저는 이런 폭발적인 상상력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경외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런 사람이 팔을 문질러 준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후략)
권여선
한국(韓)
한국 소설가 K의 이력서
권여선 (KWON Yeo sun)
저는 1965년 한국의 남쪽 도시 안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국어 이외의 언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한국어 아닌 언어로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소설이 어떻게 번역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적도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한국어의 한계 속에서만 글을 써왔고 한국어로 표현되는 언어적 형상만을 알고 있습니다.
번역된 글로 루쉰이나 하루키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문인과 작가들의 글을 읽었지만 중일 문학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제가 한중일 포럼에 나와 기조 발제를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무모하고 부조리한 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무엇인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의 위험성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위험성보다 더 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무지를 인정한 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소설가로서 제가 겪은 한국문학의 장(場)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1996년에 등단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작품이 처음 당선되는 ‘등단’이 작가로서 필수적인 입문과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등단 이후 줄기차게 글을 써온 것은 아니지만 명목상으로 저는 등단한 지 22년 된 소설가이며, 제가 그 시간 동안 통과해온 한국문학의 궤적은 한국문학에 아무리 조예가 깊은 중국과 일본의 문인들이라 해도 알지 못할, 특수하고 모순적인 국면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제 행로가 한국작가들 중에서 대표적이거나 전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모든 작가의 행로가 그러하듯 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행로 또한 한국문학의 내밀한 보편성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등단한 1990년대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묘한 접합과 단절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세계사적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시작된 시점으로 이때 한국에서는 80년대 민중문학이 물러난 자리에 한쪽에서는 80년대에 대한 ‘후일담’ 문학이, 다른 쪽에서는 개인의 내면에 주목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문학이 나타났습니다. 제 첫 소설은 두 경향 사이에서 실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후일담’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해괴한 내면의 속살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첫 소설 속에 앞으로 진행될 저의 문학적 고투와 방황이, 더 과감하게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제가 속한 ‘386세대’의 고투와 방황이 맹아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386’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조합 중 하나입니다. 이 조합은 199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 원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일컫는 말에서 하나의 세대, 한국 현대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한 세대를 일컫는 말로 전용되었습니다. 소위 386세대란 1990년대에 ‘30대’였고 ‘80년대’ 학번이며 ‘60년대’에 탄생한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그 평가는 극단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386이 ‘현재-20대-탄생’의 순서, 즉 시간의 역순이라는 점입니다. 우연한 명명이었으되 이 세대에게 운명의 낙인이 된 이 조합은, 맨 앞자리 숫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486, 586 등으로 바뀌지만 뒤따르는 두 숫자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정체성이 앞자리 숫자의 변화와 무관하게, 그 뒤에 자리 잡은 요지부동의 지층, 즉 변혁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80년대와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이 일었던 60년대라는 과거의 지층에 단단히 붙박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후략)
츄화둥
중국(中)
동아시아 문학지리학 구축의 새로운 경관
츄화둥 (QIU HUA DONG)
1
지리적으로 볼 때, 우랄 산맥에서 코카서스 산맥에 이르는 한 줄기 선을 동쪽 경계로 삼고, 서쪽으로 포르투갈에 있는 로카 곶에 이르고 다시 유럽의 최북 지점인 노르퀸 곶에서 남쪽으로 유럽 최남단 지점인 타리파 곶에 걸쳐 있는 곳, 이것이 바로 위대한 유럽 대륙이다. 최근 2,30년 동안 유럽은 스스로 전방위적인 일체화 메카니즘을 구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보다 강대한 유럽 연합(EU)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비록 얄팍한 세계주의 사상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스스로 진정으로 유동적이고 국가가 따로 없는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리적으로 지구는 거의 원형에 가까워 서반구와 동반구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전체 지구의 이미지는 거의 “서구와 그 나머지(the West and the Rest)”(스튜어트 홀)로 대별된다. “유럽과 아시아”는 이러한 이원대립 구조의 구체적인 변형이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모인 까닭은 바로 아시아와 우리의 공동체인 동아시아를 담론하기 위함이다.
아시아는 광대한 면적에 여러 나라가 분산되어 있지만 동아시아 나라들은 바싹 붙어 있어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예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 허리띠처럼 좁은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까움을 비유한다-역주)로 이웃하고 있다. 지리적인 의미에서 동아시아는 삼국 외에도 조선과 몽골을 포함하고 있으며, 혹자는 베트남이 유학 문화권에 있었다는 점에서 광의의 문화적 동아시아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일본, 한국의 조합은 나름 이유가 있으니 바로 ‘현대화’이다. ‘아세안+3’(1998년 ASEAN 10개국(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브루나이,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과 한국, 일본, 중국이 설립한 국제회의체-역주)의 구조는 중국과 일본, 한국을 정합(整合) 가능한 현대화 지역공동체로 간주하고 있다는 논리를 방증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학의 지리학은 바로 여기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후략)
나카지마 교코
일본(日)
21세기의 동아시아문학/ 마음의 연대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장소
나카지마 교코 (NAKAJIMA Kyoko)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21세기의 동아시아문학/ 마음의 연대’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강연을 수락하고, 나중에야 그 중대함을 깨닫고 당황했습니다. 너무 커다란 주제여서 저 같은 서푼짜리 작가에게는 버거운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서푼짜리 작가라는 말이 중국어나 한국어에도 있나요? 원고료가 싼, 별로 가치 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서푼은 지금 돈으로 1000원 정도일 겁니다. 저도 물론 1000원짜리 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려운 것, 너무 커다란 것에는 소질이 없기에 작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잡지에 저는 자신이 이웃나라 한국과 어떤 식으로 만나왔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문학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고 중국과도 어떤 식으로 만나왔는지를 덧붙여서, 그 연장선상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 보자. 이런 식으로 해서 저에게 주어진 난제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번은 포럼 주최국이 한국이므로 한국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한국문학과의 만남
제가 처음으로 만난 한국문학은 『윤복이의 일기』였습니다. 70년대 초반일 겁니다.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출판된 최초의 한국문학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남자아이가 동생들을 돌보면서 씩씩하게 사는 이야기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읽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와 인상이 뒤섞여, 외국이라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먼 곳이었습니다.
『윤복이의 일기』를 읽은 것은 초등학생 때로, 도쿄 근교의 아파트 단지에서 부모님과 언니와 함께 넷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김지하의 시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학자로, 서재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었는데, 김지하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시집을 읽는 것 이외의 활동은 별로 안했지만, 당시의 학자들이나 언론인은 모두 많든 적든 한국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80년대는 한국은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일전에 저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송강호가 서울에서 광주까지 독일인 저널리스트를 태우고 가는 운전사 역을 맡은, 매우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옆길로 새게 됩니다만, 독일인 저널리스트 피터가 카메라로 촬영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신문기자 한 명이 광주에 취재하러 들어간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저는 최근에 알았는데, 1980년 5월의 기사가 확실히 남아 있습니다. 그 기자는 관광지 취재나 뭐 그런 전혀 다른 목적으로 우연히 서울에 있었는데,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니까 가달라는 상사의 말을 듣고서 역시 택시로 갔다고 합니다. 피터와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네가 본 광경을 세계에 전해달라’는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경찰 비상선을 빠져나와서 기사화했다고 합니다. 저는 일본에도 이웃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을 보도한 기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기억에 당시의 일이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가 하면, 부끄럽게도 제 기억은 막연한 것뿐입니다. 물론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소년이 온다』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을 읽고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그 직전의 한국의 분위기를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지요.
(후략)
김애란(PHOTOⓒSONGHONGJOO)
한국(韓)
빛과 빚
김애란(PHOTOⓒSONGHONGJOO) (KIM Ae-ran)
'전통‘이란 말을 들으면 죽은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내게 준 것과 주지 않은 것, 준 지 잘 모르고 건넨 것들이 생각난다. 동시에 내가 받은 것과 받지 않으려 한 것, 받은 줄 모르고 받아온 것도.
오래된 것들은 대부분 작아지고 작아져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데 유독 옛날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왜 빛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오랜 이야기 속 어떤 불빛이 불현듯 서사의 온도를 바꿀 때, 누군가의 얼굴을 낯설게 비출 때 내 몸에 인 긴장이 감광필름처럼 남은 탓인지 모르겠다. 혹은 이야기가 태어난 자리에 빛(光)이, 불(火) 있는 자리에 입과 귀가 늘 있어왔기 때문인지도.
나는 여전히 경험과 지혜가 부족하지만 책을 통해 여러 가지 빛과 만났다. 그중에는 어두운 심해를 더듬는 탐조등이 있고, 신념으로 타오른 횃불도 있다. 누군가 밥 짓는 불과 총구 속 화염, 수난자의 별빛을 비롯해 사람들이 흔히 도깨비불, 혼불이라 부르는 푸르스름하고 불가해한 물질도 있다.
그 가운데 어떤 불은 지금도 내게 원초적 두려움을 일깨우는데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이 그렇다. 한밤중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불. 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도무지 저쪽 실체가 보이지 않아 얼어붙은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겐 저 눈부신 추궁 혹은 폭력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처럼 여겨지는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많은 갈등 이면에 저 전짓불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후략)
전성태
한국(韓)
죽은말 사전(死語事典)
전성태 (JEON Sung-tae)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았으라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 둥어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 치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시어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시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시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어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 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별똥을 먹으면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줏어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었다. 아저씨가 한번 모초라기를 산 채로 훔켜 잡어온, 뒷산 솔푸데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정지용의 산문「별똥이 떨어진 곳」전문
한국어의 말길을 잘 따르고 있는 산문이다. 나는 이 글을 우리 문장 중 백미라고 아껴왔다. 한 문장에서 주어가 ‘나’와 ‘할머니’, 또는 ‘자연물’로 서로 안기고 안으면서 서너 호흡 긴 문장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불끈 짜서 한 호흡으로 맺어 놓는데 그 문장이 차돌처럼 차갑다. 그래놓고 또 유장하다. 이야기는 세 번 건너뛰는데 애들 말버릇처럼 거침없고 시원하다. 닭한테 세배하는 민간 풍속으로, 밤똥이 별똥 이야기로 난데없이 옮아간다. 이야기 뻗은 자리가 얼마나 높고 아득한가. 풍경이 있고, 자연과 신화에 조응하는 정신이 있고, 흐뭇하고 막막한 서정이 있다. 한국어 입말의 활력은 물론 전승 세계의 맛을 제대로 살린 산문 중 으뜸이다.
그러나 지금은 멸종하여 만날 길 없는 문장이다. 근대 100년의 질주 속에서 한국어 사용자는 신인류나 다름없이 변하여 어문구조는 물론 저렇듯 자연에 대한 무구한 호기심과 친연성(親緣性)을 잃어버렸다.
(후략)
쑤퉁
중국(中)
전통: 민간적 상상력의 활용
쑤퉁 (SU TONG)
전통이라는 의제에 대해 논하자면 고인과 선배들에 대해 논할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만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글쓰기 입장을 고수하든, 그가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그에 대한 반역자이든 간에, 그 일생을 총괄해 보자면 전통이라는 이 거대한 건축물을 에워싸고 바쁘게 두드리며 보수하는 전통의 미장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통은 사람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나, 이 자양분을 제공하는 방식과 경로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민족 문학 전통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할 때, 언외적인 의미는 왕왕 이백과 두보, 소동파와 이청조, 『홍루몽』과 『금병매』에 감사해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두 경전적인 작품에 감사해 하는 것이고 전통이라는 이 건축물의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부분에 대해 감사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건축물의 기초에 대해 탐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기초가 어떻단 말인가? 기초는 당연히 건축물에 의해 가려져 있으며 사실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쭉 그대로 있어 왔다. 기초는 어떤 재료로 구성되어 있을까? 물론 너무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통상 색다른 것으로 분류되는 신화 전설, 민간 이야기 심지어 문자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동요, 산촌의 가요, 민요 등이 기초재료에 포함될 것이다. 거기에는 세계에 대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문학적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그것들은 민간에서 유래되어 어떻게 우리의 자양분이 되어 왔을까. 사실 우리는 매우 빨리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한 작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가장 뛰어나고 훈련이 잘 된 문자로 드러나 성과를 낼 때, 사람들이 위대한 작품이 탄생되었다고 소리 높여 환호할 때, 이 때는 아마도 바로 산촌의 노래가 사라지는 시기일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민간에서 발원한 상상력의 꽃들은 산야 가운데 소리 없이 시드는 것이다.
아베 마사히코 (PHOTO©KAWAI HONAMI)
일본(日)
일본어와 음성(音聲)의 문화
아베 마사히코 (PHOTO©KAWAI HONAMI) (ABE Masahiko (PHOTO©KAWAI HONAMI) )
지난 일 년 정도, 나는 대학입시정책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해 왔다. 트위터에 자주 코멘트를 써왔고, 『사상 최악의 영어정책-거짓투성이의 ‘4기능 간판’』이라는 책을 냈으며, 미디어에서 인터뷰를 하거나 기고할 기회도 많았다. 그런 탓인지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분들로부터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평소 하던 일은 어떻게 한 거야?’ 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러나 이 입시소동은 문학이나 문화 전반의 문제에도 직결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정책의 토대에 있는 것은 간략화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대학 교육의 최대의 목적은 회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있다. 특히 지금의 일본의 회사원에게 부족한 것은 ‘사용할 수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 사용할 수 있는 영어란 무엇보다도 ‘말할 수 있는 영어’다. ‘말할 수 있는 영어’를 몸에 익히려면 민간 시험을 도입하는 것이 최선이다…대충 이런 내용이다. 결국 키워드는 스피킹. 좀 더 친숙한 용어로 말하면, ‘영어 문장 같은 건 못 읽어도 좋으니까 좀 더 영어회화를 하자’ 라는 것이다.
이런 영어정책에, ‘응, 그럴지도 몰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회화와 문장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학학습에서도 ‘독해’냐 ‘회화(발화)’냐 하는 이분법이 된다. 이번에 ‘4기능’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4기능’이란 겉치레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독해’냐 ‘회화’냐 하는 것이 포인트인 셈이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사실은 얼마 전에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할 기회가 있어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에게 일본의 입시정책의 현황에 대해 설명해 봤는데, 모두가 왜 일본인이 ‘문장’(written English)과 ‘회화’(spoken English)라고 하는 이분법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혹시 그것이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의 대립과 같은 것이냐는 의견마저도 있었다.
사실은 이 문제는 꽤나 뿌리가 깊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메이지에서 다이쇼에 걸쳐서의 ‘언문일치운동’이다. 일본에서는 당시에 이른바 문어와 구어 사이의 괴리가 컸기 때문에, 서양풍의 소설을 도입하고자 한 문학자를 중심으로 이 갭을 메우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시도는 문학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다른 장르로도 파급되어, 마침내 일본어의 문어의 성격을 비롯해, 나아가서는 언론의 형식에까지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문어와 구어의 차이가 상당히 좁혀지기는 했지만, 양자의 간극이 완전히 메워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후략)
와카마쓰 에이스케
일본(日)
전통은 어디에 있는가
와카마쓰 에이스케 (WAKAMATSU Eisuke)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우경화하여 ‘전통’ 회귀를 입에 담기 시작하고 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빈약한 전통주의의 폐해는 교육 현장이나 헌법 개정과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전통’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근원적 사색의 성과를 찾아볼 수가 없다. 전통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로 전통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설치고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것이 단순히 시간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종국에는 문화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기 이전의 ‘원시적’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돌아가야만 하게 된다. 설령 이것이 극단적인 언설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전통을 단순히 시간적 현상으로 본다면 어느 지점까지 소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마지막까지 남는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는 사상, 문화적, 종교적 활동이 있는 모든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전통주의는 과격한 진보주의의 패배를 계기로 싹튼다. 그것은 간단히 원리주의(fundamentalism)로 연결된다. 그리고 전통주의가 파시즘과 융합할 때, 제어 불가능한 광신적인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전통’은 소생 방법을 잘못 선택하면, 인간만이 아니라 어떤 문화의 한 시대를 삼켜버릴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다.
‘전통’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문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자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하면, ‘전(傳)’에는 ‘전달한다’는 의미 외에 ‘넓힌다’, 혹은 ‘운반한다’ ‘남긴다’ ‘퍼뜨린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통(統)’은 실사변 ‘糸’에 ‘충(充)’자가 더해져서 이루어진 글자로, ‘糸’가 옷의 소재이듯이, 아직 형태는 갖추어져 있지 않지만 묶음이 되면 뭔가를 표현하는 원형(原型) 같은 것을 가리키고, ‘충(充)’은 꽉 찼다는 것, 혹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통(統)’이란 얼핏 제각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는 양상을 의미한다.
‘전통’이란 다양한 사상(事象)이 단 하나의 원천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며, ‘전통적’이란 곧 그런 유일한 것을 찾아서, 그것을 보존해 후세에 전하고자 시도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무엇을 ‘통(統)’으로 생각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그 인식의 차이에 의해 전통의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후략)
장강명
한국(韓)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
장강명 (CHANG Kang-myoung)
전에 어디서 읽은 얘기인데요, 소설가는 소설을 쓴 다음에 바로 죽어 버리는 게 독자를 위해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요. 독자 입장에서는 소설가의 설명만큼 독서를 망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 말에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당장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조금 멋쩍긴 합니다만, 독자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 단편소설 「모기」, 그리고 오늘 주제인 ‘차이’에 대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읽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어요.
단편소설 「모기」는 제가 2012년에 낸 연작소설집 『뤼미에르 피플』에 실려 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 있는 가상의 오피스텔 빌딩인 ‘뤼미에르 빌딩’의 8층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요, 단편 열 편이 느슨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모기」는 이 소설집의 두 번째 단편이고, 그래서 802호에서 벌어지는 일로 설정했습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약간 어둡고 환상적인 분위기입니다. 「모기」도 그렇죠. 다 읽어도 몸이 마비된 중년 남자가 여자아이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인지, 여자아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이 몸이 마비된 중년 남자를 상상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썼습니다. 그리고 옆집에 사는 청각장애인 이야기와 우울한 임산부 이야기가 한번씩 언급됩니다.
이 소설을 쓸 때 저는 37살이었거든요. 이 당시 저는 한국 사회의 공고한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2000년 즈음까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격렬한 변화의 시기였고, 당시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만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2000년 이후로는 눈에 띄게 사회의 역동성이 줄어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다들 경험하셨듯이 2000년 이후 어느 나라에서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계화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이뤄진 단일화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경제는 각각 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로, 생산과 소비는 기업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맥도날드 방식’으로, 문화는 ‘젊음, 풍요로움, 섹스’를 중시하는 미국대중문화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다 보니 적어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점점 비슷해져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후략)
진은영
한국(韓)
동아시아, 차이와 마음의 연대
진은영 (JIN Eun-young)
한․중․일 세 나라의 작가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게 될 ‘차이’는 어떤 이미지일지 생각해본다. 그것은 마티스의 작품에서 종종 보게 되는 파랑과 노랑, 혹은 빨강과 연두처럼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차이 같은 것일까? 아니면 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매화와 벚꽃과 살구꽃, 이 세 종류의 꽃들이 보여주는 차이 같은 것일까? 이 꽃들은 모르는 이들이 보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있지만, 잘 아는 이들에게는 이 꽃들을 혼동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서로 달라 보이기도 한다.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유사함과 차이를 동시에 보여주는 세 종류의 꽃나무들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다.
희고 작은 봄꽃들이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의 서가에서 릴케의 시집을 꺼내 읽다가 아름다운 이미지 하나를 발견했다. 릴케는 똑같이 생긴 방들 사이로 서로 다른 시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것이 릴케가 생각하는 차이의 이미지다.
보라, 그들이 똑같은 가능성을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펼쳐가는가를,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개의 똑같이 생긴 방 사이로
각각 다른 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자매」 부분
우리는 오랫동안 동아시아라는 똑같이 생긴 방에 거주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가능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펼쳐왔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전혀 다른 기질을 지닌 자매들처럼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강한 개성을 지녔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낱낱이 아는 자매들처럼 우애 깊게 지내게 될 것인가? 나는 물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자매」의 이어지는 연들에서 릴케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 시인은 따뜻한 소망에 대해 말하는 대신 현실을 서늘하게 알려준다.
(후략)
장웨이
중국(中)
숲과 바다와 개 -『아버지의 바다』 창작배경
장웨이 (ZHANG WEI)
과거를 떠올리면 마음속에 함께 떠오르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숲, 바다, 개. 이것들은 내 유년과 떼어놓을 수 없다. 숲은 해변 가의 평야 위에 위치해 있었고 개와 각종 동물들이 그 숲 속에 살고 있었으며 나 역시 그들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유년은 구속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 문만 나서면 우리는 해변을 향해 단숨에 후다닥 달려가곤 했다. 해변 가의 숲은 무성했지만 인적은 드물어 숲 속에는 작은 마을 몇 개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사냥꾼, 약초꾼, 어부들이 이 숲 속에서 활동했다. 숲에 대한 전설은 매우 많았는데 전설의 주제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주로 사람들한테 동식물을 해치지 않을 것을 일깨워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전설은 인간과 동식물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사람은 종종 동물의 선량함이나 지혜에 못 미친다거나 오래된 나무만큼 존중할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다는 것 등이었다.
국영 임업 농장의 노동자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으며 우리 또한 그들한테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먹을거리를 가져다주었으며 자신들의 개를 구경시켜 주었다. 과수원의 사람들은 좀 달랐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와 사이가 좋을 때는 무척 친절했다. 겨울과 봄은 언제나 좋은 계절이었다. 그 계절에 그들은 논두렁을 보수하고 물을 주고 가지를 잘랐으며 무성한 꽃밭에서 일을 했다. 사람들도 상냥했다. 그들은 우리와 농담을 하면서 서로 먹을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가장들끼리는 자주 왕래했는데 서로 웃음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과일이 달리게 되면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성격이 거칠어졌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머리를 써서 과일을 서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릴 적 앵두, 자두, 사과에 대한 욕구는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무조건 훔치고 따야만 했다. 과일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모든 것을 덮었다. 그 시기를 내 생애에 있어서의 “과일 시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후략)
차오유윈
중국(中)
마음의 유대감 : 아버지세대의 탁월한 동아시아 시 쓰기
차오유윈 (CAO YOU YUN)
이 글에서 나는 세 분의 동아시아 시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반 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시 쓰기를 통해 동아시아 시가에 관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뚜렷하게 명시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 크나큰 격려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 아버지가 모두 1930 년대에 태어난 관계로 나는 그들을 ‘아버지세대’라 부르기로 한다. 이 세 분은 바로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1931-), 한국 시인 고은(1933-), 중국 시인 창야오(昌耀1936-2000)이다. 당연히 이 세 분의 선배님들은 모두 탁월한 시인이며 나아가 위대한 시인이다. 세분 중, 고은 선생과 다니카와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시고 창야오 선생은 2000년 3월, 밀레니엄의 서광이 이 고독한 행성을 비추던 봄날 황망히 이 세계와 작별했다. 나는 일반 독자의 신분으로 중국 전통에 따라(우리 동아시아 전통이기도 함) 제일 연장자인 다니카와 선생부터 얘기하기로 한다.
내가 다니카와 선생을 안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로 1990 년대에 그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거얼무(格爾木)의 어느 한 문방구 도서 코너에서 산 것인데 몇 번의 이사로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시집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 후에 다니카와 선생의 여러 시기 대표작을 그와 그의 지기인 역자 톈위안(田原) 선생이 공동으로 정선하여 번역된 새로운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다시 살 수 있었다.
시마다 마사히코
일본(日)
이대로 저물어가도 되는 걸까, 인류?
시마다 마사히코 (SHIMADA Masahiko)
냉전시대의 세계 종말 이미지는 핵전쟁에 의한 파국과 그 후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통속적으로 정착한 것은 <매드맥스>나 그와 비슷한 내용인 <북두의 권>에서 볼 수 있는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의 이미지였다.
현재는 핵전쟁에 추가해서, 화석연료의 과잉소비에 의한 지구온난화나 팬데믹, 미증유의 대지진이나 대규모의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 ‘대(大)파국’을 초래하는 요인이 증가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인명구조나 피난생활, 도시 인프라의 부흥에는 상상력이 미친다. 누구나 전시하의 궁핍생활이나 경제봉쇄 하에서, 혹은 지진이나 대규모의 정전을 통해서, 100년, 200년 전의 생활로 되돌아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런 ‘소(小)파국’에는 익숙해 있다. 하지만 ‘대파국’은 말 그대로 인류와 문명의 멸망이므로,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해도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대파국’ 후에 살아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죄악감이나 의무감에서, 혹은 언제까지고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잃어버린 문명의 보존 혹은 부활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도의 분업을 당연시해온 현대인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된다. 산업혁명의 과정을 충실하게 다시 더듬어가는 것에 가깝다. 처음에는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 남은 식료품, 생활필수품을 찾아다니는 도시지역에서의 수렵채집생활로 꾸려가겠지만, 그 후에는 물, 식료품, 연료, 정보 등의 조달에 애를 먹게 된다. 강물의 여과나 연료용 땔감 찾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윽고 농업을 시작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도구, 부품, 기계를 직접 만들고, 노동효율을 높이고 싶어진다. 그 경우에는 연료나 전력도 손에 넣고 싶어지고, 다른 생존자와의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이동이나 수송, 통신을 위한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생기며, 병에 걸리면 약이 필요해진다. 반드시 전력을 복구해야 한다면 강의 흐름을 이용한 소규모 수력발전이나 태양광발전이 현실적일 것이다. 요즘의 수렵이나 농업, 가내수공업으로의 회귀경향은 단순한 복고취미에 그치지 않고, 소비문명의 쇠퇴 후에 찾아오는 위기의 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된다. 물론 문명의 재건은 제로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과거의 기술이나 예지를 축적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은 재건의 출발점이 된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카타스트로프 후에는 도서관이 문명재건의 노하우가 축적된 정보센터가 된다. 공원이나 공터는 식료품 생산에 활용되고, 분뇨구덩이가 부활하며,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도시 지역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생존에 불리해지므로, 각지로 분산시켜 소집단의 공동체를 형성해 분업태세를 구축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라이프스타일이 된다.
(후략)
오야마다 히로코 (PHOTO©SHINCHOSHA)
일본(日)
차이의 교착(交錯)
오야마다 히로코 (PHOTO©SHINCHOSHA) (OYAMADA Hiroko (PHOTO©SHINCHOSHA))
내 소설은 종종 환상이랄지, 기이한 상상과 같은 단어로 평가되곤 한다. 가령 작품 속에 도감에 실리지 않은 동식물이 나올 때, 혹은 매우 친근한 생물이 기묘한 행동을 할 때, 그리고 그 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똑같지 않을 때 그렇다. 완성된 소설은 어떻게 읽혀도 저자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다만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즉 있을 수 없는 어떤 일이든 이상한 일이든 현실과 환상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의 우화로서의 환상적인 요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느 것이나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이다. 물론 소설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이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 대부분이 상상일 거라고, 환상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형태를 바꾼,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경험이나 체험이 있다.
이번에 제출한 「숙모를 찾아가다」라는 작품은 꿈에서 본 정경을 토대로 썼다. 꿈은 내 뇌 안에서만 일어나지만, 그래도 분명한 현실이다. 나는 실제로 그것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는 당황했다. 꿈에서 깨어나 그 느낌을 쓰려고 생각해서 곧바로 썼다. 그런 식으로 꿈을 토대로 쓴 작품이 그 외에도 있다. 또한 소설에 나오는 동식물도 종종 꿈에서 본 것을 쓴다. 꿈속의 생물들은 뭔가와 뭔가가 섞여 있거나, 뭔가가 결여되어 있거나 응시하려고 하면 형태를 바꾸거나 사라져버리거나 하지만, 그 질감이나 습도를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런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나 생물들의 기묘함과, 가령 근처의 논에서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새우나 거머리, 혹은 TV나 도감에 나오는 머나먼 외국의 화려한 색을 띤 나비나 조롱박처럼 생긴 코가 달린 원숭이들의 기묘함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은 그것을 실제로 봤는지, 느꼈는지, 체험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나는 TV에서 본 기묘한 원숭이와 함께 지낸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TV에서 기묘한 원숭이를 본 사실을 쓸 수는 있지만).
(후략)
방현석
한국(韓)
평양행 항공기에서 치른 모국어 시험과 한국문학의 미래
방현석 (BANG Hyeon-seok)
1910년.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36년.
1945년. 독립과 분단과 전쟁, 그리고 휴전 65년.
2018년. ( )
한국어는 이 ( ) 안을 어떻게 채우게 될까.
4월 27일, 판문점에서 만난 한국어가 세계에 중계되었다. 남북의 정상이 통역을 쓰지 않고 회담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만났다. 한국의 다른 작가들이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감격스럽고도 착잡했다. 모국어를 다루는 작가임에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절반의 삶은 내 문학 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내 문학 안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감당해야할 절반의 삶을 다루고 있는 북한문학도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국어의 절반만을 겨우 감당하는 불구의 작가들이란 사실에 대한 자각조차 없이 문학을 하고, 살아왔다.
생방송을 통해 주고받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대화를 지켜보며 나는 2005년 평양을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남북작가대회 실무대표로 나는 베이징에 있는 북한대사관에서 방문증을 발급받아 JS152편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던 후배 작가 한 명과 함께였다. 기내에서 나누어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국신고증’을 받아들고 나는 난감했다.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나는 신고증의 ‘국적’란 앞에서 끙끙거렸다. 대한민국, 한국, 남한, 남조선... 나는 결국 ‘남’이라고 썼다.
곧 순안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나는 신고증의 다른 한 칸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민족’이었다. 한국민족, 조선민족, 한민족, 배달민족... 어려운 문제였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물어보았다. 그 여성은 대답 대신 자신의 입국신고서를 펼쳐보였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단어, ‘조선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정답을 보았고, 분명 그녀와 같은 민족이었지만 그녀와 같은 답을 적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순안공항 착륙 직전에 ‘우리민족’이라고 썼다. (후략)
최은영
한국(韓)
전쟁 없는 미래
최은영 (CHOI Eun-young)
고등학생 때 <한겨례 21>에서 베트남 전쟁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읽었다. 한국이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고 배워 왔었기에 그 특집 기사는 내게 충격과 슬픔을 줬다. 전쟁이 민간인 대량 학살, 강간, 고문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알았다. 베트남 전쟁에 관해 알게 되면서 무심히 보곤 했던 전쟁 뉴스에 더 이상 무심해질 수 없었다.
스물두 살 무렵 여행을 하다가 베트남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수녀님에게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들,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지나간 일이에요. 괜찮아.’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해주셨는데 그 순간 서로 나눴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스물넷에는 베트남에서 2주일 지낼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며 만났던 베트남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집으로 갔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크게 차려주신 밥상과 가족들의 따뜻한 환대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억이다.
「씬짜오, 씬짜오」는 내가 만났던 다정한 베트남 사람들을 떠올리며 썼던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95년, 독일 플라우엔이라는 작은 도시가 배경이다. 이곳에서 한국인 ‘나’의 가족과 베트남인 투이네 가족이 만난다. 두 가족은 서로를 좋아하고 깊이 의지한다. 한국인 소녀 ‘나’는 어느 저녁 식사 시간에 ‘한국은 어느 나라도 침략한 적 없다’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이 한 마디로 인해서 평범했던 저녁 식사 자리는 상처받은 호 아저씨 가족과, 그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의 아빠의 갈등으로 번진다.
‘나’의 친구 투이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는 ‘나’의 엄마와는 다르게 ‘나’의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슨 얘길 해? 그럼,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돼? 왜 당신이 나서서 미안하다고 말해? 당신이 뭔데?” 그는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응웬 아줌마에게 말한다.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형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상처받은 마음으로 호 아저씨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다. 결국 두 가족은 멀어지게 된다.
(후략)
레이핑양
중국(中)
미래에 관한 글쓰기
레이핑양 (LEI PING YANG)
나의 글쓰기 경험상, ‘미래’라는 단어는 미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문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미적 특성의 범주에서 미래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모든 것으로 상상 속의 모든 것과 허공 속의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는 시를 쓰는 과정의 모든 정신적 자산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천국에 대한 꿈에 가깝다. 그리고 미래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것은 오늘날 우리는 허약한 글쓰기와 사상 결핍이 서로 갈등하는 소용돌이에 처해 있으면서, 현실에 대한 통제 불능과 미래에 대한 무지로 인해 겪는 멘탈 붕괴와 두려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늘 우리의 글쓰기는 미래 지향적이며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으로 포장되어 왔다는 점이며, 그래서 마치 미래는 정말로 글쓰기로 인해서 슬프게 죽어간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의 천당처럼 여겨져 왔다는 점이다.
1946년, 러시아계 천체 물리학자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는 미국 공군기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순회 강연을 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가 뉴욕의 한 카페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실제로 한 순간에 대뇌 속에서 원자와 아원자가 선회하고 분자와 행성, 은하계와 초은하계가 선회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바로 카페 계산서 뒤에 수학공식으로 자기가 본 모든 것들을 신속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당시에 자신이 단숨에 써 내려간 조잡한 글씨를 식별해 낼 수 없게 되면서 그 순간 신이 내려주신 듯한 비밀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 예술가 크루거와 리히터는 이 사실을 다시 언급하면서 가모브가 자신의 과거 필적을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는 이전과 같이 정확하게 이 세계를 볼 수 없게 되었다’라고 했다.(후략)
푸웨후이
중국(中)
대풍가(大風歌)
푸웨후이 (FU YUE HUI)
우리 집 뒤뜰에 대나무가 제법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숲 옆에 커다란 멀구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멀구슬나무의 굵은 줄기는 곧게 뻗어 대숲 넘어 어느새 이층집 높이만큼 자라나더니 사방으로 곁가지가 뻗었다. 급기야 작은 길 건너 앞집 왕씨네 옥상까지 파고들 기세였다. 매년 봄이 오면 멀구슬나무에 꽃이 피는데 보랏빛 다섯 개 꽃잎이 가지 위에 가득 달라붙어 오밀조밀, 생기발랄하게 가볍게 흔들리며 거의 잎사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봄날 큰 바람이 대숲이 윙윙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불면 대나무가 앞뒤로 흔들리고 시든 낙엽이 하늘 가득 휘날렸다. 봄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겨울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분분히 날아다니는 마른 대나무 잎 사이로 작디작은 보랏빛 꽃송이가 섞여 마치 낙하산처럼 맴돌며 허허롭게 떨어져 잘디잔 별처럼 후원을 가득 채웠다.
뒤뜰은 처음에는 진흙땅이었다가 나중에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바닥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틈새로 왕바랭이와 환삼덩굴이 자라기 시작했다. 잡초가 웃자라 무성하게 되자 우리는 뒤뜰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시멘트 바닥이 모두 사라지고 진흙땅으로 원상회복되었는데……몇 번이나 이리 반복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뒤뜰의 담장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흙벽돌로 쌓은 토담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토담이 무너지자 속이 빈 벽돌로 낮은 담장을 쌓았는데 언제인지 벽돌 담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틈새로 취령단초(臭靈丹草, 익치육릉국翼齒六棱菊)가 푸릇푸릇 자라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 집에서 새로운 담장을 쌓았고……정원이 바뀐 것이 마치 큰 바람에 계절이 바뀐 것만 같았다.
이리 심한 변화가 어찌 우리 집 작은 뒤뜰에서만 그쳤겠는가? (후략)
나카무라 후미노리 (PHOTO©KENTA YOSHIZAWA)
일본(日)
미래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PHOTO©KENTA YOSHIZAWA) (NAKAMURA Fuminori (PHOTO©KENTA YOSHIZAWA))
저는 어릴 시절부터 그다지 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도 사람이면서 사람이 무서웠으며, 매일같이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세계는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걸까? 사는 것이 괴로웠기에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한계에 달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모두 똑같은 제복을 입습니다.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 같은 시간, 같은 방에 들어가 수업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당연한 일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어진 거지요.
집단생활이 불가능하다면, 앞날이 뻔하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10대에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 때에 구원해준 것이 문학이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같은 작가들이었지요.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저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많은 위안을 받았던 거지요. 제가 문학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등 독서의 경향이 세계의 작가들로도 확대되어 갔습니다.
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인간이 쓴 소설에 구원을 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인간에 대한 불신도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학자들이 생각하고 계속해서 써온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후에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소설을 쓸 때마다 그런 질문을 계속 던져왔던 것 같습니다.
(후략)
우에다 다카히로 (PHOTO©SHINCHOSHA)
일본(日)
‘미래’에 이끌려서
우에다 다카히로 (PHOTO©SHINCHOSHA) (UEDA Takahiro (PHOTO©SHINCHOSHA))
어느덧 16년 전의 일이 되었다. 당시 나는 와세다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대부분의 문과 계열 학부생들이 그랬듯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학점을 취득하느냐를 미덕으로 삼는 대학생 중 하나였다. 학점 취득이 용이한 과목을 알기 위해서 뜻 있는 학생들이 발행하는 잡지까지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남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 것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이웃나라의 존재를 처음으로 친근하게 느낀 것은 그런 대학생 시절이었다. 내가 속해 있던 국제법 연구팀에서 팀원 전체의 한국 방문이 기획되었다. 도쿄에서라면 오키나와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 가깝고도 먼 나라. 지도교수가 주축이 된 기획이었으며,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 의한 <한국어특별강좌>까지도 교수가 주선했다. 자유참가였지만, 시간이 남아돌던 대학생들인지라 많은 팀원들이 참가했다. 아마 한일공동주최의 월드컵대회가 열린 해의 일이었을 것이다. 양국의 거리가 갑자기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물리적인 거리에 비해서 당시의 일본은 한국에 대해 아직 지금만큼의 친밀감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말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배우는 사람은 언어습득을 시작했던 연령으로 돌아가야 해서, 이웃나라에서 온 유학생이 읽어준 예문을 어린아이처럼 따라읽었다---고 한다고 전해들은 것처럼 얘기하게 되는 것은, 나는 그 한국여행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특별강좌에도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가한 팀원들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한국어의 울림이 매우 매력적이다.”
“한국어를 읽어주는 여성 강사의 목소리 또한 예쁘다.”
“화장실 어디에요? 이 말만은 외워둬라.”
팀원들의 들뜬 어조에 일찌감치 불참을 표명한 나는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어특별강좌>만이라도 몰래 들으러 갈까 했다.
(후략)
김금희
한국(韓)
그러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김금희 (KIM Keum hee)
편집자로 일하며 20대 시절을 보낸 나는 도대체 좋은 책은 어떻게 만드는가, 우리는 출판노동자로서 어떤 커리어를 쌓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내 손으로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 단체에서 하는 출판 강의를 들었다. 정부에서 비용을 지원하고 일주일에 한번 한 시간쯤 일찍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 측의 배려가 있어야 하는 자기계발의 시간이었다. 강사는 대부분 출판사 사장들이었고 듣는 이들은 나처럼 출판사 직원들이었는데 우리를 공통으로 감싸고 있던 그 나른한 오후의 활기 없는 분위기를 기억한다. 하기는 이미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있었다면 굳이 그 자리에 와서 재교육을 받을리가 없으니까 거기에 뜨거운 열의와 흥분이 있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을 것 같다. 처음의 결심과 달리 나 역시 그 공간의 이상한 무기력에 젖어 들어갈 즈음, 강사로 나선 어느 출판사 사장이 그 뒤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선언을 하나 했는데 그것은 세상에는 이상한 삼천 명의 독자가 있어서 어떤 책을 만들든 팔리게 되어있다는 희한한 말이었다. 그때 이미 초판 부수도 소화하지 못하는 일련의 기획을 해왔던 나는 그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렸다.
오래된 일이라 맥락을 자세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내 기억에 그는 독자라는 대상을 그 개체를 하나하나 셀 수 없는 나비 떼, 혹은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새로운 익명의 존재들을 끊임없이 마주치는 이 거대한 자본주의사회의 숨은 게릴라들쯤으로 묘사했던 것 같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가 정말 도무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진정 이런 책도 구입한다면 그것 좀 매우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은 책을 만들었는데도 그마저도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삼천 권이 팔렸고 그것을 산 독자의 전화까지 받았는데 그때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연령대의 독자였고 매우 특이한 감상평을 남겨 놀랐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후략)
심보선
한국(韓)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많다
심보선 (SHIM Bo-Seon)
독자들은 나를 늘 놀라게 한다. 내가 어떤 의도로 썼던 시구를, 심지어 어떤 의도로 썼는지도 망각해버린 시구를 독자들은 놀라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내가 창작한 좁은 맥락을 거시적으로 넓혀 역사성과 사회성을 부여하고 넓은 맥락을 미시적으로 좁혀 생생함과 육체성을 부여한다.
때때로 독자들은 쪼잔할 정도로 문장과 단어에 매달린다. 그들은 숫자에 주목하기도 한다. 왜 14나 16이 아니고 15인가? 혹은 반대로 비평가들이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과감하게 비약한다. 가족사에 관한 메타포가 독자들에게는 “빨치산 이야기”가 된다.
왜 독자들은 때로는 쪼잔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해석을 감행하는 것일까?
독자들은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사와 비평이론이라는 학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참조틀이 그들에게는 필요 없다. 혹은 그러한 참조틀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해석의 주요 지침이 아니라 선택가능한 수단과 자원일 뿐이다. 독자들은 개념을 사용할 때 학문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비밀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을 상상하며 흥분한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해석과 경험은 분리돼 있지 않다. 나는 내 작품 속에 아무 의미 없는 “복권 예상 당첨 번호”를 적어 넣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독자는 “실제로” 그 번호로 복권을 구매했고 “실제로” 5000원에 당첨됐다. 독자는 그 번호에 모종의 마술적인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한 재미로 그 번호로 복권을 구매했을 수도 있다. 한 서점이 마련한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 독자는 그 경험담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내 시가 전혀 심오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매우 독특한 해석 작업을 통해 “현금화”되는 유일무이한 경험을 접했다. 나는 그 독자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그 5000원을 저와 독자분이 나눠 가져야 하나요? 거기 제 지분이 있을까요? 있다면 얼마나 될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후략)
쉬쿤
중국(中)
독자를 찾습니다
쉬쿤 (XU KUN)
삼십 여 년 전, 막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나의 독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누가 나의 글을 보는 지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거친 힘만 믿고 진지하게 글을 쓰며 무조건 앞으로 나아갔다. 공연한 허세를 부리며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았다. ‘청춘’이라고 불리는 세찬 동풍의 힘에 기대어 봄물이 불어나고 봄날의 파도가 커지는 것처럼, 내면의 광활함에 몸을 내맡기고 붓끝에서 마음껏 춤추며 베이징의 건조한 모래밭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독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다양한 독자들이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노인도 있고 소년도 있었다. 다양한 관객이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래밭에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통을 준수하는 엄정한 비평가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우러러 보았고 어떤 사람은 내려다보았다. 찬미하고 칭송하기도 하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기도 하였다. 귀에 거슬리는 충언이든 아니면 과도한 칭찬이든 나는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 같고 뜻밖의 기쁨을 만난 것 같아 덥석덥석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어떠하든지 간에, 글로 뚫어놓은 마음의 길은 어느 순간 갑자기 통하고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길은 이 세계에 도착했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도착했다. ‘독자’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드넓은 이 세계와 정신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독자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천오백만 인구가 사는 베이징이라는 대도시에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독자가 있는 곳에 작가가 있다. 그리고 작가가 있는 곳에 독자가 있다. 이 두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대상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과 역사에 대해 독자가 ‘토로’하려는 요구를 만족시켜준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들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갖도록 해준다.(후략)
왕웨이롄
중국(中)
글쓰기는 독서를 부르고 있고 또 창조하고 있다
왕웨이롄 (WANG WEI LIAN)
나 자신의 글쓰기를 곰곰이 성찰해 보며 나는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부터 독자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누가 내 작품을 읽을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교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겸손함과 오랜 독서 역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마도 작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독서를 하지 않고 완전히 현실 속에만 묻혀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독서는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공간이다. 내가 볼 때 글쓰기와 독서가 진입하는 곳은 같은 공간이다. 나는 시인 미워시(체스와프 미워시, 1911~2004, 폴란드 시인—역주)가 말한 ‘제2의 공간’이라는 문학의 정의를 빌리고 싶다. 이 공간은 기계적으로 우리의 현실 공간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공간과 복잡하게 뒤섞여 대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자로서 나는 여러 나라의 문학 작품을 많이 읽었다. 한국과 일본의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받은 느낌은 다른 나라의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달랐다. 나의 마음속에 신비로운 친근감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과 일본 작품에 나타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각별한 배려와 함축적인 감정 표현은 중국인들 마음속에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유교 문화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 사유할 수 있다. 왜 유교 문화가 있고, 유교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틀림없이 그러한 생명 관념과 삶의 방식 면에서 심층적인 유사성에 기인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심층적인 유사성에서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작품이 나에게 가져다 준 그런 친근감을 이해하고자 한다.(후략)
시마모토 리오 (PHOTO©HAYATA DAISUKE)
일본(日)
독자
시마모토 리오 (PHOTO©HAYATA DAISUKE) (SHIMAMOTO Rio (PHOTO©HAYATA DAISUKE))
문예지의 신인상에 소설을 응모해서 작가로서 데뷔한 것이 2001년 17세의 봄이었다.
연령이 젊은 탓도 있어서 이제까지 주로 친근한 제재였던 연애를 다뤄왔다.
고등학교 교사와 옛 제자 사이의 사랑을 그린 『나라타주』가 대표작으로 꼽혀, 작년에 유카사다 이사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해서, 작가로서의 나를 설명할 때는 연애소설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심은 연애라기보다는 ‘연애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것’에 있다.
독자층도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인 30대부터, 대학생, 고등학생과 같이 비교적 젊은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독자를 향해서 표면화되지 않은 성폭력이나 학대의 트라우마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있다.
왜냐하면 사춘기 소녀들에게는 어른의 교묘한 지배욕이나 성욕은 일견 연애와 매우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청춘시절을 보낸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의 도쿄로, 일본에서는 버블경제기의 말기에 해당한다. 그 여운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의 몇 년간이었다.
다만 90년대 후반에는 버블이 꺼졌다고는 하지만 도쿄에는 아직 그 잔향이 감돌고 있었다.
뭐든지 돈으로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무신경함과, 그런 시대의 종말에 대한 불안이 혼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기말이라는 말도 그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여고생이 돈을 받고 어른과 육체관계를 맺는 ‘원조교제’라는 단어가 유행한 것은 나 자신이 고등학생 때다.
당시에 시부야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남자 어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얼마 주면 뭘 해줄래?”
라는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은 적이 몇 번이나 있다. 그 중에는 거절했는데도 강제로 끌려갈 뻔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위태로운 시대의 일그러진 가치관에 노출되었던 감각은 동시대의 여성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략)
시바사키 도모카 (PHOTO©KAWAI HONAMI)
일본(日)
거리(距離)와 독자
시바사키 도모카 (PHOTO©KAWAI HONAMI) (SHIBASAKI Tomoka (PHOTO©KAWAI HONAMI))
내가 처음으로 외국 작가들과 교류하는 오늘과 같은 자리에 참가한 것은 2010년 12월, 이번 포럼이 개최되는 것과 같은 서울에서의 일이었다.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문예지가 각 나라의 작가의 단편을 게재한다는 기획의 일환으로서, 서울을 방문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세 나라의 작가가 단상에 오른 자리에서 일본어로 짧은 스피치를 하고, 그것이 우선 한국어로 통역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어를 중국어로 통역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거쳐서 중국어로 통역되어야 했다. 첫 단계까지는 방청객의 반응 등으로 대충 어느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번역된다는 것, 외국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번역이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번역만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쓴 시점부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멀어져간 그 지점에 독자가 있는 거라고.
(후략)